BeWylder


혼자 있는 것, 같이 있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비정상적이 되기 쉽다.
이말은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좀더 오랫동안 어울릴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말은 매너리즘, 권태에 빠지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by 비와일더 | 2012/01/14 11:57 | 궤변론의 문헌학 | 트랙백 | 덧글(0)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사람이 평생 자기 하고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다. 그건 사실이다. 때로는 자기가 하기 싫어도 해야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자기 하기 싫은 일만 하며 살 수는 더더욱 없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니체는 자신의 책을 통해 기독교를 비난하고 무조건적으로 이타주의를 강조하는 주장에 병적으로 거부감을 나타냈다. 니체는 그러한 주장에 한 때나마 동조했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기만한 철학과 사상에 끝없는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나는 요즘들어 니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가 된다. 남을 돕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느꼈을 때 해야 즐겁지 남이 하라고 해서 하면 전혀 즐겁지 않다. 어떤 책에 나타난 글을 따라서 행동한다거나 산다고 해서 나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다.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나 자신만이 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에라야만이 내가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지는 않다. 대부분은 자기가 진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른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주 정확하게 안다. 그사람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을 제안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유의 방식은 그들에게 맞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그들을 불행하게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놔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성공하였을때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움을 얻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이들과 달리 스스로에 대해 투명할 정도로 진솔하고 강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그들은 그 자체로 초인이기 때문이다.
by 비와일더 | 2011/12/11 01:47 | 궤변론의 문헌학 | 트랙백 | 덧글(0)
예술성에 내재한 독창성에 관하여
알퐁소 마리아 무샤는 '예술은 영원하므로 새롭거나 구식이라는 것은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예술성이 일종의 객체로서 주관과 분리되어 객관화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필연적으로 주관성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찾는 이유는 그를 통해 아름다움과 함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이고 예술작품을 통해 정신적 환기와 함께 새롭다는 감정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 부분을 유심히 관찰해 본다면 예술작품을 찾는 행동의 동기의 이면에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내적 매너리즘과 일명 'Status quo'로부터 벗어나고픈 충동을 읽을 수 있다.

사실 예술가와 혁명가, 몽상가의 심리는 일견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현실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 다만 예술가는 그러한 권태를 벗어나 그들이 꿈꾸기에 이상적인 상태를 시각이나 청각 혹은 촉각, 미각을 통해 표현하여 특정 감정을 환기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반면에(물론 그들중 대다수는 그렇게 환기된 감정을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그러한 감정을 환기시키는 대상을 구체화하는 것이 그들의 일차적 목표로 간주할 것이다), 혁명가나 몽상가는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는 이상적인 대상을 그들의 비전 안에 구체화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에 단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물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이를 현실에 도입하는 과정은 위험을 수반하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통제되고 안정적인 환경에 머물러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희망하고 그래서 새로운 조직체를 창출하기보다 안정적인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험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통계적으로 희귀하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언젠가 우리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초인에 다름 아니다.
by 비와일더 | 2011/11/27 16:23 | 궤변론의 문헌학 | 트랙백 | 덧글(0)
Hedgehog's Complex

고슴도치 컴플렉스는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상처받는 자신이 두려워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딜레마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컴플렉스는 꼭 상대방에게 상처받기가 두렵기 때문에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짜증나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가 고슴도치 컴플렉스의 정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고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고, 그래서 점차 그쪽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언젠가
하룻밤의 정사를 나누고 나서 그쪽을 볼때, 나를 너무나도 좋아해주는 그쪽의
눈빛이, 그리고 내게 너무도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는 그쪽의 몸짓이(물론 한켠에는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점점더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내 자신을 답답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계속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역겨울 정도로 피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조금 차갑게 상대방을 대하고 조금씩 상대방을 피하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상처를 받고 나에게 더 매달리고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며 이제는 정말 그쪽이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느껴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할 때 그래서 그렇게 헤어졌을 때
정말로 속이 후련하고 잘됐다고 느끼는게 당연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의
빈자리가 점차 크게 느껴지고 조금씩 내가 왜 이런 미친짓을 하게 됐는가 의구심이
드는 시간이 늘어간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징그럽게 후회하고 어이없게 상대방을
그리워해서 다시금 끊었던 연락을 다시 취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이성을 찾아 떠나게
된다.

우스운 일이다. 왜 이런 바보같은 행동이 발생하고 계속 되풀이되는 것일까?
우리에게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감정을 적절히 대처하는 것을 모르는 미숙함 때문에?
확실히 이러한 경험은 책을 통해서는 알기 어렵고 직접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번 경험하고 그 추이를 정확히 기억한다면, 아! 내가 정말 바보같은 짓거리를
해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내가 그동안 여자친구를 거의 사귀지 않았던 이유가 드디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소개팅을 했으면서도 왜 오래 지속되지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끊은 그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이유도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든, 소셜 서클 내에서든 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상대방을 놔주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이유도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건 관계에 있어서의 근본적 회의감. 상대방을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
관계에 질식해 억눌리기보다는 차라리 혼자서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은 마음.
바로 그것이 진짜 이유였다.

그래서 내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그런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이전에
본능적인 수준에서 강한 매력을 발휘하여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끔 나를 빨리
매혹시켜야 하는데, 대개 그런 이성은 너무 높으신 곳에 있어서 나란 사람은 거들떠
보지 않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평범한 이성과 관계를 맺기에 내 회의감은 무척이나 강해서
그런 이성과 관계를 맺을 생각만으로도 내 비위가 상해버린다는 점이다.
(이성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난 사실 매력적이지도 않은 마당에 비위는 너무 약하다.
물론 이건 내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이성관계라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수 있고 끊어야 하는 죄악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종족보존이라는 유전자의 명령을 극복할 수 없는, '골콘다'라는 이상을 실현하기에
무지한 나같은 우매한 대중에게는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거쳐가야 하는
일종의 필요악, 혹은 귀찮은 통과의례?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by 비와일더 | 2011/11/06 23:55 | Wyld의 목소리 | 트랙백 | 덧글(0)
옷에 반영된 문화적 종속성
그간 명동에 옷을 사러 돌아다녔다.
옷을 입어보면 느끼는 거지만 이건 몸에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추는 기분이다. 캐주얼 코너에 가서 사이즈 가장 작은 옷을 달라고 해도 입어보면 소매끝이 손바닥을 넘어 손가락에까지 오지를 않나, 상의가 벨트쯤에 와야하는데 엉덩이를 넘어 다리가 있는 곳까지 오지를 않나...
태그를 보면 키 170 내외가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180정도는 되어야 옷이 몸에 맞을 정도? 아니면 내가 어깨가 좁거나 팔다리가 짧은건가? 그것도 아닌데...
점원에게 물어보면 서양인 체격을 기준으로 옷을 만들어서 몸에 좀 안맞을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다수가 몸에 맞지도 않은 옷들을 적당히 입고다닌다는건지, 그게 아니면 뭔지...

근데 정장코너에 가면 내 몸에 딱맞는 옷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정장코너의 옷이 더 비싸다. 이는 옷을 입으려면 몸이 서양인 체격이든가 돈이 더 많아야 된다는 소리다.
그럼 어좁에 돈도 없으면 옷을 막 입고 다니라는 소린가? 이 무슨 말도 안되는...
by 비와일더 | 2011/10/10 22:11 | 눈동자에 비친 세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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